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단 편집) == 은행강도 혁명가 == ||[[파일:ZiemeLc.jpg|width=100%]]|| || 젊은 시절의 스탈린 || 스탈린은 자퇴 후 방황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했고, 이에 감명받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당시 혁명 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맡은 일은 자금 조달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자금 조달이고, 실상은 [[강도죄|강도질]]이였으며 위험하고 범죄였기에 누구 하나 맡으려 하지 않았다.[* 멘셰비키는 이를 이유로 볼셰비키를 범죄 집단이라 비난했고, 훗날 레닌은 자금줄이 안정화되는 대로 이 일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금 조달에 자원했다.[* 당시 조지아에서는 부르주아를 털어먹는 건 도둑질이 아닌 의적이라 칭송했기에 스탈린도 자신의 행위는 도둑이 아니라 의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스탈린은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현금 수송차를 털거나, 인질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거나, 파업을 선동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고, 스탈린도 이를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했는지 이때의 행적은 잘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일 [[레프 트로츠키]]에게 '우리가 혁명하는 동안 놀고 먹던 잉여'라는 투의 비난을 받았고, 최근까지 정설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자들에 의해 조지아 문서 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스탈린의 젊은 시절 활약들이 밝혀졌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 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 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의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는 엄밀히 말하면 레닌파에 속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작지만 독립적인 정파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후세인들이 10월 혁명을 당연히 레닌이(레닌파가) 주도했다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당대인들은 오히려 '''레닌파와 트로츠키파가 연합'''하여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볼셰비키 정부를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부"라고 부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과 대충 동급'''이라 쳐줄 수 있는 정치인으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스탈린은 레닌의 하급자 내지는 부하'''라 해야 할 확고한 레닌파 정치인으로써 주로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실무담당자' 역할, 특히 그중에서도 위험하고 지저분해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입장이었기에 레닌의 신임을 얻었다. 결국 트로츠키의 이름값이 스탈린과 비할 수 없이 높았던 것도 맞지만 스탈린 역시 레닌의 유언장에 거론된 후계자 다섯 명 중 하나, 즉 유일한 2인자인 트로츠키만 빼면 3인자이자 네 명 중 하나라는 입지를 얻은 것은 그에 상응하는 실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흔히 스탈린의 맞수들이 스탈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쟁쟁한 인물들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조지아 촌놈' 스탈린에 대비하여 '레닌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자 코민테른 의장'이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대회 의장이자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던 [[레프 카메네프]],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자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거꾸로 보면 그 '조지아 촌놈'이 서기장(총비서)이라는 시시해보이는 직책에서 담당하던 역할이 딱 봐도 삐까번쩍한 저런 직함들에 전혀 뒤지지 않았기에 라이벌 구도가 성립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스탈린은 혁명 과정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던 잉여 백수라는 트로츠키의 디스 역시 (트로츠키 개인의 오만한 성격 이전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 분석이나 증언이 아니라 '''정적에 대한 공격'''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을 이기기 위해, 이후에는 자신을 실각시키고 추방한 스탈린에게 보복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정치적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 트로츠키의 처지였고, 당 내 장악력과 실무 능력에서 우위였던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의 우위는 대중적 지명도나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활약상에 있었으니 자신이 우위인 부분을 내세워 스탈린이 자신만 못하다고 공격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스탈린의 행적이 가진 객관적 약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겠느냐는 것. 결국 이러한 문제는 이후 소련의 절대 권력자로 떠오른 스탈린 역시 한때 여러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의 분석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려 이런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해석 역시 등장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lin%27s_Mug_Shot.jpg|width=100%]]|| ||1900년에 찍은 [[머그샷]]. || 아무튼 이런 범죄 행각 때문에 1급 수배자가 된 스탈린은 7번이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방만한 관리와 스탈린의 정치력 덕에[* 죄수들을 선동해 싸움을 붙인다거나 주변 여인과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는 등 [[http://sonnet.egloos.com/3918105|링크]]] 유형지에서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스탈린은 전부 다 빠져나갔다.[* 스탈린은 집권 후 이때 편의를 봐준 간수와 마차에 태워준 마부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또한 이 7번의 도주 탓에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게 '너 사실 러시아 제국의 프락치 아니냐'라는 투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실 이 역시 상당 부분은 까기 위해 이유를 찾아낸 정치적 공세라고 봐야 할 것이, 러시아 제국 당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탈출은 현대의 교도소와는 비교하기 무의미할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유형의 목적 자체가 귀찮은 정치범을 정치의 중심인 수도에서 떼어놓는다+시베리아 오지의 개발 인력 충당 정도라 별다른 감시가 없었기 때문. 7회면 좀 많은 편이긴 하나 유명 러시아 혁명가치고 시베리아 유형 갔다가 탈출 한두 번 못해본 인물은 드물고, 서너 번쯤 탈출 성공도 찾기 어렵지 않다.] 1900년 5월 1일, 스탈린은 티플리스 위쪽의 산속에서 500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불법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세 달 동안 [[트빌리시|티플리스]]의 여러 공장과 철도 회사에서 파업이 발발한 파업에서 스탈린은 주요한 선동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티플리스에서는 2000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진압됐다. 6개월 후인 11월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초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바투미|바툼]]으로 파견되었고, 1902년 2월 그 도시의 주요 공장들에서 11개의 비밀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다음 해인 1902년 2월 29일에 정유 공장의 6000명의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행진했다. 물론 이것도 군대가 발포하여 15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스탈린 본인도 체포되어 4월까지 투옥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 3년을 선고받았다. 물론 탈출하여 1904년 2월에 티플리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사회주의 혁명가로써 시작한 첫 번째 유형 생활이었다. 1905년 12월 25일, 스탈린은 [[핀란드 대공국]] 탐페레에서 열린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8B%9C%EC%95%84_%EC%82%AC%ED%9A%8C%EB%AF%BC%EC%A3%BC%EB%85%B8%EB%8F%99%EB%8B%B9_%EC%A0%9C1%EC%B0%A8_%EB%8C%80%ED%91%9C%EC%9E%90%ED%9A%8C|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 conference. 대회(congress)와는 다르다.]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대표자회 장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탐페레로 변경된 것을 전달받지 못해서 페트로그라드로 갔다가 탐페레까지 갈 기차표 값이 없어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여비와 식대를 빈대붙었다고 한다.] 이후 스톡홀름의 당대회에 참여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만나 친구가 되었고, 런던에 갔다가 항구 노동자들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던 걸 구해진 계기로 막심 리트비노프와도 인연이 생긴다.[* 후일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이 자기를 숙청하지 않은 건 그때 자기가 구해줘서 그런 거라는 내용의 농담을 종종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스탈린이 아니고 그냥 주가슈빌리였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 동료인 알레크산드레 (알리오샤)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ალიოშა) სვანიძე, [[1886년]] ~ [[1941년]] [[8월 20일]])의 남매인 에카테리나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1885년]] [[4월 2일]] ~ [[1907년]] [[11월 22일]])와 만나 결혼도 하여 아들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두었으나, 잦은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결국 카토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 참가한 스탈린은 매우 우울해 했으며, "아내는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 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장례식 막바지에 아내의 무덤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함께 묻어버리라고 오열했다. 그 순간 오흐라나(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첩자들이 장례식장을 습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스탈린은 금세 감정을 추스른 뒤 달아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